아주 적은 수의 무기만이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었으며, 그중 하나가 바로 영국의 롱보우(장궁)입니다.
이 무기는 주로 중세 에드워드 시대에 사용되었고, 비록 잉글랜드의 무기였지만, 특히 에드워드 3세(1327~1377년 재위) 시기에는 웨일스 병사들에 의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롱보우는 에드워드에게 중요한 승리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아쟁쿠르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한 세기를 구해냈습니다.
영국 롱보우의 역사
중세 시대 전반에 걸쳐, 심지어 그 이전에도 궁수는 군대의 중요한 요소로 평가되었습니다. 전투에 참여한 양측 중 궁수를 보유한 측이 종종 우위를 점했습니다.
궁수들은 전장의 후방에 서서 보병이 전장으로 뛰어들기 전에 먼저 공격을 개시할 수 있었으며, 이는 근접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적의 병력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궁수들은 몇 발의 잘 조준된 화살로 적의 말을 쓰러뜨릴 수도 있었습니다.
롱보우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전장에서 널리 사용된 것은 에드워드 1세(1272~1307년 재위)의 치세 때부터였습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 "스코틀랜드의 망치"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잉글랜드에서 가장 뛰어난 성곽 건축 왕 중 한 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에드워드의 통치 기간 동안 카나번(Caernarfon)과 콘위(Conwy) 같은 성곽들이 건설되었는데, 이러한 성들은 기존의 목책과 흙으로 된 모트 앤 베일리 성채에 비해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 성곽들은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안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벽에 작고 좁은 틈을 두어 궁수들이 두꺼운 벽 뒤에서 안전하게 적을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이 구조는 일반적인 활이나 석궁을 사용하는 궁수들에게 이상적이었지만, 문제는 이 무기들이 사거리가 충분히 길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따라서 더 긴 사거리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고, 그 답이 바로 영국의 롱보우였습니다.
영국 롱보우의 제작
롱보우가 멀리까지 화살을 쏠 수 있기 위해서는 단단한 재료가 필요했습니다. 롱보우를 만들 때 주로 사용된 나무는 주목(yew) 나무였지만, 때로는 느릅나무나 물푸레나무도 사용되었습니다.
주목 나무를 사용한 롱보우 제작 과정은 길고 까다로웠습니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제작에는 최대 4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먼저 주목 나무를 말리는 데만 2년이 걸렸으며, 이후 나무를 천천히 구부려 활 모양으로 만드는 과정에도 2년이 더 소요되었습니다.
롱보우는 일반 활보다 길어야 했습니다. 그 길이는 약 1.98미터(6피트 6인치)로 추정되며, 이를 당겨 쏘기 위해서는 상당한 힘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롱보우 병사들은 전장에서 훨씬 더 뒤에 위치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영국 롱보우가 사용된 다양한 전투와 그 효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폴커크 전투(1298)
영국 롱보우가 효과적으로 사용된 첫 번째 사례 중 하나는 1298년 7월 22일 스코틀랜드 폴커크에서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에드워드 1세의 잉글랜드 군대(약 15,000명)는 스코틀랜드의 반란 지도자 윌리엄 월리스와 그의 군대(약 6,000명)와 대치했습니다.
수적으로 우세했던 잉글랜드 군대는 이전 해 스털링 브리지 전투에서 월리스가 더 큰 잉글랜드 군대를 물리친 경험 때문에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월리스는 "실트론"(schiltron)이라는 전술을 사용해 병사들을 빽빽하게 배치했고, 이는 쉽게 뚫기 어려운 진형이었습니다.
또한, 실트론은 땅에 꽂힌 말뚝으로 보호되었으며, 이 말뚝 덕분에 근접 전투를 시작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에드워드는 뛰어난 군사 전술가였고, 스털링 브리지에서의 경험을 통해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는 근접 전투 대신 롱보우를 사용하기로 했으며, 이것이 잉글랜드의 승리로 이어졌습니다.
월리스의 병사들도 활을 사용했지만, 그들은 전통적인 짧은 활을 사용했기 때문에 전투에 훨씬 더 가까이 있어야 했습니다.
반면, 잉글랜드의 롱보우 병사들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스코틀랜드 병사들에게 화살을 퍼부을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 이후, 에드워드 1세는 모든 스포츠를 금지하고 일요일에 궁술만 연습하게 했습니다. 이는 롱보우와 궁술이 중세 잉글랜드 전쟁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결정적인 조치였습니다.
더플린 무어 전투(1332)
영국 롱보우가 또 한 번 중요한 역할을 한 전투는 1332년 8월 11일 스코틀랜드 퍼스 근처에서 벌어진 더플린 무어 전투였습니다.
에드워드 발리올의 1,500명 병력은 15,000에서 40,000명으로 추정되는 훨씬 큰 스코틀랜드 군대와 맞섰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스코틀랜드 군대는 잉글랜드 진영을 무너뜨리려 했으나, 오히려 자신들의 진형이 무너졌습니다.
전장에 진입한 첫 번째 스코틀랜드 군대는 뒤에서 온 증원군과 함께 계곡에 갇혀 움직일 공간조차 없었습니다.
무기를 제대로 뽑을 수 없었던 많은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밟혀 죽었고, 그들을 피해 살아남은 병사들도 잉글랜드 롱보우 병사들의 공격을 받아 결국 패배했습니다.
할리돈 힐 전투(1333)
1333년 7월 19일 할리돈 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참전했습니다.
잉글랜드 군대는 언덕 위에서 방어 진영을 펼쳤으며, 병력은 약 10,000명이었지만 15,000명으로 추정되는 스코틀랜드 군대를 상대로 또 한 번 롱보우의 위력을 발휘하며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잉글랜드군은 전략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스코틀랜드 군대가 언덕 아래에서 공격해 오기 전에 롱보우로 많은 병력을 사살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잉글랜드군은 도망가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을 8마일 동안 추격했고,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과 지도자들이 전사했습니다.
크레시 전투(1346)
영국 롱보우가 언급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전투 중 하나는 크레시 전투입니다.
크레시는 백년 전쟁 중 1346년 8월 26일에 벌어진 전투로, 에드워드 3세의 가장 위대한 군사적 승리 중 하나로 종종 묘사됩니다.
이 전투에서는 에드워드의 16세 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가 또 다른 중요한 지휘관으로 활약했습니다.
크레시는 흥미로운 전투였는데, 프랑스군도 궁수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석궁을 사용한 것이 큰 패인이었습니다.
석궁은 위력이 강했지만, 화살 속도가 느렸습니다. 반면, 롱보우는 훨씬 빠르게 발사할 수 있었고, 숙련된 롱보우 병사는 석궁병보다 거의 두 배의 속도로 화살을 발사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롱보우의 속도와 효율성 덕분에 잉글랜드는 또 한 번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포이티에 전투(1356)
크레시 전투가 롱보우의 중요성을 증명했다면, 포이티에 전투는 이를 더욱 확실하게 했습니다.
1356년 9월 19일, 흑태자 에드워드는 또 다른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롱보우 병사들은 프랑스군의 공격을 무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아쟁쿠르 전투(1415)
영국 롱보우의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는 바로 1415년 아쟁쿠르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헨리 5세의 소수 병력은 프랑스 대군과 맞섰습니다.
헨리 5세의 군대는 대략 6,000명에서 9,000명으로 추정되며, 이 중 절반 이상이 롱보우 병사였습니다. 반면 프랑스군은 대략 15,000명에서 36,000명으로, 그들 중 대부분은 기병이었습니다.
전투 전, 헨리 5세는 병사들에게 방어를 위해 나무말뚝을 심도록 했고, 이 말뚝은 프랑스의 기병 돌격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롱보우 병사들은 프랑스 기병들이 접근할 때까지 멀리서 화살을 퍼부었고, 프랑스 병사들이 돌격하려 했을 때 이미 사상자는 크게 증가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롱보우의 공격을 견디지 못했고, 진흙투성이의 전장에 갇혀 돌격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습니다.
프랑스군의 전진이 멈추자 영국군은 보병을 전방으로 내보내 프랑스 병사들을 격퇴했습니다. 아쟁쿠르 전투는 영국 롱보우의 위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아 있으며, 헨리 5세는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롱보우의 쇠퇴
영국 롱보우는 오랜 세월 동안 잉글랜드 군대의 중요한 무기로 사용되었지만, 그 명성은 점차 쇠퇴했습니다.
롱보우의 효과는 궁수의 숙련도에 크게 의존했는데, 롱보우를 잘 다루기 위해서는 오랜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더 간단하고 강력한 무기들이 등장했습니다.
16세기 중반, 화약 무기의 발달과 함께 총기류가 전투에서 주요 무기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총은 훈련 시간이 짧았고, 롱보우와 달리 강한 신체 능력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군사적 효율성 측면에서 큰 이점을 제공했으며, 결국 롱보우는 전장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롱보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유산은 계속해서 존경받고 있습니다.
롱보우는 중세 잉글랜드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덕분에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 전설적인 위력과 상징성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롱보우는 군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