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희곡(The Scottish Play)’로 알려진 이 작품은 영어로 쓰인 가장 잘 알려진 희곡 중 하나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이 비극을 집필할 당시 다양한 사건과 자료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맥베스는 왜 쓰였는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지속적인 영향력을 가진 비극으로 꼽힙니다. 초자연적 요소, 잔혹한 줄거리, 심리적으로 복잡한 캐릭터를 결합한 이 희곡은 셰익스피어가 받았던 다양한 잠재적 영향을 뛰어넘는 강력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맥베스 역시 당시 관객들에게 익숙한 자료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고전 작품과 역사적 기록을 접목하여 작품에 진정성을 더했습니다.
마녀 재판이 셰익스피어에게 미친 영향
셰익스피어는 당시 마녀들에 대한 전형적인 특징(주로 나이가 든 여성, 동물 ‘친숙한 것(familiars)’ 소유, 약초와 식물에 대한 지식 등)에 의존했을 뿐만 아니라, 원작 관객들에게 즉각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악명 높은 마녀 재판에서 세부적인 요소를 끌어왔습니다.
1590년, 제임스 1세 국왕은 자신의 암살을 모의한 혐의를 받은 100명이 넘는 ‘마녀들’의 재판을 감독했습니다.
이 사건은 노스 베릭 마녀 재판(North Berwick Trials)으로 알려져 있으며, 제임스 1세의 저서 Daemonology에 상세히 기록되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초연되기 10년 전인 1597년에 출간된 이 책은 당시 마녀들의 주문과 그들을 찾아내는 방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현대 마녀학 백과사전은 맥베스의 ‘세 운명의 자매들(Three Wyrd Sisters)’의 대사와 행동에서도 명확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홀린셰드 연대기(Holinshed’s Chronicles)가 맥베스의 원천이었는가?
많은 르네상스 시대 극작가들처럼 셰익스피어도 고전 및 역사적 텍스트에서 많은 줄거리를 가져왔습니다(이러한 교육은 문법 학교 시절에 핵심적인 부분이었습니다).
맥베스의 주요 원천은 라파엘 홀린셰드의 연대기(Chronicles)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협업 저서는 1587년에 재출판되었으며,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포괄적인 역사로 묘사되었습니다.
문학적 스타일로 쓰인 이 책에는 마녀들(홀린셰드의 해석에서는 아름다운 님프로 묘사됨), 맥베스, 그의 아내, 밴쿠오, 맥더프와 같은 친숙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홀린셰드의 맥베스는 약한 국왕 던컨을 전복한 후 10년 동안 평화롭게 통치한 현명하고 자비로운 왕으로 그려집니다. 또 다른 중요한 차이는 홀린셰드에서 밴쿠오는 맥베스의 공범으로 묘사된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차이점은 셰익스피어가 제임스 1세 국왕의 영향을 받았음을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제임스 1세, 제임스 6세가 《맥베스》에 미친 영향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는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합한 왕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으며, 제임스 1세의 치세 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왕이 후원한 배우 극단인 킹스 맨(King’s Men)의 일원이었던 셰익스피어는 군주의 감각과 신념에 부합하는 작품을 창작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맥베스》에서는 제임스 1세가 믿었던 마녀와 마법에 대한 신념이 신왕권 사상과 결합되어 나타납니다. 이 작품의 중심 교훈은 군주를 위협하거나 전복하려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관객들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셰익스피어는 실제로 제임스 1세의 조상이었던 뱅코를 맥베스와 대조되는 도덕적으로 선한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그의 아들 플리언스는 탈출에 성공하며, 결국 제임스 1세로 이어지는 가문을 시작할 것으로 암시됩니다.
화약음모 사건이 《맥베스》에 미친 영향
《맥베스》는 1606년에 처음 공연되었으며, 이는 가이 포크스가 웨스트민스터 지하실에서 36개의 화약통을 폭발시키려다 발각된 사건이 발생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맥베스》를 정치적 연극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왕권 찬탈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대중에게 설득하려는 명백한 동기 외에도, 셰익스피어 개인적으로도 이 작품을 쓰려는 이유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비밀 가톨릭 신자였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화약음모 사건의 주모자인 로버트 케츠비의 아버지 윌리엄 케츠비와 친구였다는 점이 그 예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왕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려 했다는 이론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예는 레이디 맥베스가 남편에게 한 유명한 대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순수한 꽃처럼 보이되 그 밑에 숨은 뱀이 되라"고 지시합니다. 화약음모 사건 이후 제임스 1세는 음모가 저지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주화를 발행했으며, 이 주화에는 꽃들 사이에 숨겨진 뱀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헨리 가넷의 양면성과 처형이 셰익스피어에 미친 영향
킹 덩컨이 살해된 후 극 중 코믹 relief로 종종 활용되는 문지기 장면(porter scene)은 극적 호기심을 자아내는 독특한 장면입니다. 문지기는 극 중 단 한 번 등장하며, 관객에게 직접 연설을 하면서 자신을 ‘지옥문(Hell’s Gate)’의 문지기라고 소개합니다.
이 장면은 보통 맥베스의 성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들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히지만, 셰익스피어 당대의 관객들이 즉각적으로 알아챌 수 있는 당시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한 풍부한 암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양면성(equivocating)’에 대한 빈번한 언급입니다. 이 논리적 오류의 놀라운 영감은 헨리 가넷의 재판과 처형이라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헨리 가넷은 예수회 신부로, 고해성사를 통해 화약 음모(Gunpowder Plot)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폭력을 경고했지만 직접적으로 이를 저지하지 않았고, 음모를 알았다는 사실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논거는 고해성사의 신성함을 배신하는 죄가 위증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양면성을 가졌다’고 주장했지만, 이 변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1606년 5월 공개 처형되었습니다.
이는 맥베스가 초연된 시점으로부터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지기 장면은 어두운 정치적 풍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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