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전설에 따르면, 로마는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의해 기원전 753년에 건설되었으며, 그러나 도시 성벽이 완전히 세워지기도 전에 형제 중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이 형제들은 트로이 영웅 에네아스를 통해 트로이의 후손으로 전해지며, 에네아스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었습니다. 또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전쟁의 신 마르스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혈통은 로마가 주변 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복할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본 글에서는 로마 창건 신화의 기원과 목적, 그리고 이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전설적인 혈통
로마 전설에 따르면, 로마인은 기원전 1184년에 그리스인들에게 파괴된 트로이의 상속자들이라고 전해집니다. 에네아스는 트로이 왕가의 일원으로, 왕자 헥토르와 파리스의 이종사촌이었습니다.
그는 노쇠한 아버지 앙키세스를 등에 업고 동료들과 함께 트로이를 탈출했습니다. 에네아스의 어머니는 로마 신화에서 비너스로 알려진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였습니다.
트로이인들은 새로운 고향을 찾기 위해 수년간 방황하며 시칠리아와 카르타고를 거쳐 이탈리아 반도에 도달했습니다.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처음에는 환영받았습니다. 라틴족의 왕 라티누스는 아들이 없었기에 자신의 딸 라비니아를 에네아스와 결혼시켰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왕자 투르누스가 라비니아와 결혼하기를 원하면서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이 갈등은 비너스가 에네아스를, 헤라의 로마식 이름인 유노가 투르누스를 지지하면서 피를 부르는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두 남자는 단판 승부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로마식 제우스인 유피테르가 유노에게 투르누스를 지원하지 말라고 설득하면서 에네아스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에네아스는 이후 아내의 이름을 따서 라비니움이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라틴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에네아스는 그의 아들 아스카니우스에게 뒤를 이었으며, 아스카니우스는 알바 롱가라는 도시를 수도로 삼고 알반 언덕(로마에서 약 30km 거리)에 세웠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 아스카니우스의 후손인 누미토르가 알바 롱가의 왕이 되었습니다.
쌍둥이 형제의 추방
기원전 8세기 초반, 알바 롱가의 왕 누미토르는 그의 동생 아물리우스에 의해 왕좌에서 쫓겨났습니다. 새로운 왕이 된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의 손자가 자신을 권좌에서 끌어내릴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습니다.
이에 그는 누미토르의 딸 레아 실비아를 여신 베스타를 섬기는 베스타 성녀로 삼았습니다. 베스타 성녀의 서약에 따라 그녀는 평생 자녀를 낳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그녀는 로마 신화의 아레스에 해당하는 전쟁의 신 마르스의 방문을 받았고,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게 되었습니다.
아물리우스는 이 쌍둥이 형제를 보고 두려워하여 티베르 강에 던지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백설공주의 사냥꾼처럼, 이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 이를 끝까지 수행하지 못하거나 꺼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이들은 아이들을 강에 던지지 않고 강가에 버리고 갔으며, 쌍둥이들이 자연적으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쌍둥이는 암늑대 루페르칼(Lupercal)의 보호를 받아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늑대는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며 보호했고, 이후 누미토르에게 충성하는 양치기 파우스툴루스가 이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쌍둥이를 집으로 데려가 그들의 정체를 모른 채 키웠습니다. 하지만 쌍둥이는 곧 자연스러운 지도자로 성장하였고, 주변 젊은 전사들을 규합했습니다.
어느 날, 양아버지의 양을 돌보던 쌍둥이는 아물리우스의 목동들과 싸움을 벌였고, 레무스가 붙잡혀 아물리우스 왕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로물루스는 자신의 동료들을 이끌고 레무스를 구출하며 아물리우스를 살해했습니다.
이로써 누미토르는 왕좌를 되찾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자신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되었고, 알바 롱가의 왕좌를 제안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새로운 도시를 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로마의 건국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자신들이 어릴 적 암늑대에게 발견된 장소 근처에 도시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도시를 어디에 세울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을, 레무스는 아벤티노 언덕을 선호했습니다.
형제는 신들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새의 행동을 통해 신의 의지를 알아보는 조류 신탁을 받기로 했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선호하는 언덕에 신성한 장소를 마련하고 조짐을 기다렸습니다.
레무스는 6마리의 새를 보았다고 보고했지만, 로물루스는 12마리의 새를 보았다며 자신의 장소가 신의 가호를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레무스는 자신이 먼저 새를 보았으니 우선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반박했습니다.
이로 인해 두 형제는 갈등을 벌였고, 로물루스는 레무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언덕에 도랑을 파고 성벽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레무스는 로물루스의 성벽을 조롱하며 이를 뛰어넘었습니다. 이 행동에 로물루스와 그의 지지자들이 분노했고, 결국 로물루스나 그의 지지자 중 한 명이 레무스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대부분의 전설에서는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였다고 전하지만, 오비디우스는 로물루스의 부하인 셀레르(Celer)가 레무스를 죽였다고 주장합니다.
오비디우스의 이야기에서는 죽은 레무스가 양부모인 파우스툴루스와 그의 아내 아카 앞에 나타나 셀레르의 행동을 비난하면서도 형 로물루스의 형제애를 칭송했다고 합니다. 이는 오비디우스가 로물루스를 형제 살해라는 비난에서 구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든 이야기에서 로물루스는 형제의 죽음을 애도하며 레무스에게 장례식을 성대히 치러주었다고 전합니다.
로마의 건국과 초기 왕정
로물루스는 자신의 도시를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로마라 명명했습니다. 그는 지지자들로부터 로마의 첫 번째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는 약 200년 동안 지속된 선출 군주제의 시작이었으며, 이 군주제는 기원전 753년부터 기원전 509년 마지막 왕이 폐위되고 공화정이 수립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로물루스는 미래의 위대한 도시 로마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성벽인 무루스 로물리(Murus Romuli)를 세워 도시의 경계를 강화하고, 쟁기로 고랑을 파며 도시의 경계를 명확히 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시민들을 세 가지 부족으로 나누어 세금과 군사 서비스의 체계를 만들고 원로원을 설립했습니다. 또한 도시 건설 과정에서 매 단계마다 유피테르에게 제사를 올려 신의 가호를 받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남성들로 이루어진 시민들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이웃한 사비니족의 여인들을 납치해 아내로 삼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비니족과 갈등이 발생했으나, 분쟁을 해결하면서 사비니족은 로마 시민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로물루스가 사망한 후, 로마인들은 그가 신격화되어 신들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었습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기리며
로마의 상징과 초상화
공화정이 성립된 이후 로마는 왕정을 완전히 거부하였습니다. 한 사람에게 지나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견제와 균형의 장치를 마련했지만, 이러한 체제는 결국 실패로 이어져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와 프린켑스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조차도 스스로를 ‘왕(rex)’이라 칭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로마에서 ‘왕’이라는 용어가 매우 혐오스러운 단어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건국자이자 초대 왕이었던 로물루스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기념되고 존경받았습니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젖먹인 암늑대는 로마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로물루스와 신 퀴리누스의 연결
기원전 1세기경부터 로물루스는 고대 로마 신 퀴리누스(Quirinus)와 연관되기 시작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Plutarch)의 로물루스의 생애에 따르면, 로물루스는 실종되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 후 프로쿨루스 율리우스(Proculus Julius)라는 인물 앞에 나타나 자신이 퀴리누스라고 밝히며 신으로 숭배받아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대 사비니(Sabine)의 전쟁신 퀴리누스는 신격화된 로물루스와 결합되었습니다.
레무스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독립적인 중요 인물로 대우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로물루스의 형제로서 암늑대와 함께 묘사되긴 했지만, 로마의 예술이나 문학에서 독립적으로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로마 건국 신화의 진실은?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신화적 배경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로마인들 자신이 믿었던 건국 신화의 중심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실제 역사를 반영하는지는 의문입니다.
로마인들 사이에서 이 이야기가 등장한 가장 초기 증거는 기원전 3세기로, 이미 오래된 전통으로 자리 잡은 시기입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인물 자체가 창작된 것일 가능성이 높지만, 이 신화는 로마 건국 과정의 일부 요소를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고학적 증거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로마는 기원전 7세기 초 라틴족(Latins)과 사비니족(Sabines)의 소규모 정착지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로물루스의 전설적인 시대보다는 조금 뒤이지만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왕국으로 묘사된 알바 롱가(Alba Longa)는 당시 작은 마을들의 집합체에 불과했다는 증거가 있어 이 부분의 신뢰도는 낮습니다. 알바 롱가는 베스타(Vesta)와 주피터(Jupiter)와 같은 종교적 중심지로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로마의 위치 선정과 초기 갈등
로마를 설립한 부족들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아니라 실용적인 이유로 장소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티베르 강은 교역을 위한 교통로를 제공했으며 언덕은 방어에 유리했습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간의 갈등은 로마 초기 부족 간의 충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 초기의 성장과 에트루리아인의 역할
로물루스의 도시 건설
로물루스가 짧은 시간 안에 웅장한 도시를 세운 것으로 전해지지만, 실제로 로마는 기원전 7세기 말까지 소규모 정착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후 에트루리아인(Etruscans)이 로마를 장악하면서 본격적인 발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전설에서도 반영되는데, 기원전 7세기 말 에트루리아 출신의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Lucius Tarquinius Priscus)가 로마의 왕으로 선출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에트루리아인의 기여
에트루리아인은 볼로냐에서 나폴리만까지 확장된 도시국가 연합체로, 이들의 영향으로 로마 언덕 사이의 습지가 배수되고 도로가 건설되었으며 공화국과 제국의 웅장한 도시의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신인 티니아(Tinia)라는 이름으로 주피터를 로마에 가져왔습니다.
로마의 신앙 체계
로마에서 처음 숭배된 카피톨리노스
삼위일체(Capitoline Triad)는 에트루리아의 최고신 주피터, 사비니족의 주요 신 퀴리누스, 그리고 이탈리아족의 주요 신 마르스(Mars)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와 같은 삼신 숭배는 이 지역에서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부족들의 융합과 각 부족의 신들을 기리려는 필요성을 반영한 독특한 형태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삼신은 기원전 6세기 말까지 주피터 옵티무스 막시무스(Jupiter Optimus Maximus), 유노 레지나(Juno Regina), 미네르바(Minerva)의 익숙한 삼위일체로 대체되었습니다.
역사와 전설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이야기는 로마 건국에 이르는 정확한 역사를 묘사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기원과 세계 속 위치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로물루스는 비너스(Venus)의 후손이자 마르스(Mars)의 아들로, 신탁을 통해 축복받은 도시를 세웠고 이후 신이 된 인물로 묘사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신들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신성한 은총은 그들에게 이탈리아를 넘어 전 세계를 지배할 권리를 부여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로마 국가 종교의 핵심 신념은 바로 이 신성한 은총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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