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유권자들은 후보자들이 정중하게 정책을 논의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왜 미국에서 비방과 네거티브 캠페인이 흔히 일어나는 걸까요?
서론: 비방과 네거티브 캠페인의 합법성
1787년 작성된 미국 헌법에는, 유능하고 경험이 풍부하며 고결한 선거인들이 과반수를 차지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인 선거인단 제도가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직을 위한 선거운동은 그다지 고상하지 않은 방식으로 빠르게 변화했습니다. 존 애덤스와 토머스 제퍼슨 사이의 첫 번째 경쟁에서부터 오늘날의 대립에 이르기까지, 비방과 네거티브 캠페인은 미국 정치에서 풍부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그렇다면 미국 역사상 가장 극적인 정치적 불화는 무엇일까요? 어떤 더러운 소문이 명백히 거짓이었으며, 어떤 것이 소름 끼치게도 사실이었을까요? 여기 미국 정치의 불명예스러운 "네거티브 전술" 전통을 살펴보겠습니다.
미국 헌법이 비준된 후 2년 뒤인 1789년에 추가된 권리 장전의 첫 번째 수정안은 시민들이 표현의 자유를 가질 권리를 명시했습니다. 이는 불쾌하거나 무례하고 심지어 개인적으로 모욕적인 발언도 법적 처벌 없이 할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런 조악한 언어가 대통령 선거에 등장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미국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선거인단에 의해 차분하게 선택되었지만, 그 이후의 모든 대통령은 선거운동을 통해 경쟁해야 했습니다.
비방과 네거티브 캠페인은 첫 번째 당파적 대통령 선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002년에 제정된 양당 캠페인 개혁법(BCRA), 일명 매케인-파인골드 법안은 "광고 책임" 조항을 포함하여 후보자들이 자신의 공격을 직접 인정하도록 강제했습니다. 이는 네거티브 캠페인에 대한 드문 제한 중 하나입니다. 이전에는 연방 통신 위원회(FCC)가 "공정성 원칙"을 사용해 반대 의견에 대한 동등한 방송 시간을 보장했으나, 이는 1987년에 폐지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등 시간 규칙"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인터넷 캠페인 광고의 만연으로 인해 FCC가 이를 거의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시작점: 애덤스 대 제퍼슨 (1796년 및 1800년)
1796년, 조지 워싱턴이 3선 출마를 포기하자 부통령이었던 존 애덤스가 대선에 출마했습니다. 애덤스는 연방주의자였으며, 국무장관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이라는 공화주의자와 맞붙게 되었습니다.
두 정당의 지지자들은 빠르게 비방전, 즉 모욕과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익명의 칼럼니스트는 제퍼슨이 자신의 노예와 불륜을 저질렀다는(이후 사실로 판명됨) 내용과 그가 미국 독립 전쟁 중 겁쟁이였다는 비난을 담은 칼럼을 신문에 기고했습니다.
반면, 존 애덤스는 제퍼슨만큼 키가 크지 않다는 점을 들어 그의 비만을 조롱하며, 그가 과대망상증에 빠져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애덤스는 1796년 대선에서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지만, 제퍼슨은 1800년에 다시 도전했고 비방전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제퍼슨이 도덕성이 결여된 인물로, 애덤스는 리더로서 부족하다는 비난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제퍼슨이 승리하여 최초로 당파적 권력 이양이 이루어졌고, 애덤스는 저항하지 않았기에 1800년의 평화적 혁명이 이루어졌습니다.
포퓰리즘 대결: 앤드류 잭슨 대 존 퀸시 애덤스 (1824년 및 1828년)
1824년, 민주공화당이 강세였으며, 네 명의 후보가 대통령직을 두고 경쟁했습니다. 그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남부 출신의 앤드류 잭슨은 1812년 전쟁에서의 영웅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잭슨이 가장 많은 득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후보도 과반수의 선거인단을 얻지 못해 미국 하원에서 대통령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원은 전 대통령 존 애덤스의 아들인 존 퀸시 애덤스를 대통령으로 선택했고, 이에 잭슨은 분노했습니다.
4년 후, 잭슨은 다시 선거에 출마하며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그의 지지자들은 애덤스 대통령이 대중이 아닌 하원의 비밀 조작을 통해 승리했다며 공개적으로 부패를 비난했습니다.
이에 애덤스 지지자들은 잭슨의 사생활과 그가 노예 소유자이자 전직 군인으로서의 잔인함을 공격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잭슨은 1828년 대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복수에 성공했고, 그의 "잭슨 민주주의"는 공격적이고 포퓰리즘적인 캠페인을 고무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전해집니다.
남부에 배제된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 대 스티븐 더글러스 대 존 C. 브레켄리지 (1860년)
남북 전쟁(1861~65년)을 앞두고 노예제 문제로 선거는 더 치열해졌습니다. 일리노이주 출신 변호사 에이브러햄 링컨은 1860년 신생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습니다. 그는 노예제에 반대했으며, 이는 주로 남부 농민을 대표하는 민주당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여름과 가을 동안 민주당은 링컨의 외모까지 공격하는 등 심한 비방전을 펼쳤습니다.
남부 주들은 링컨(그리고 모든 공화당 후보들)을 배제하려 했으며, 공화당 투표용지를 인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투표용지" 대신 "티켓"을 사용했는데, 유권자들은 선거일에 원하는 정당의 티켓을 투표함에 넣는 방식이었습니다. 남부 주들이 공화당 티켓을 인쇄하지 않았음에도 링컨은 인구가 많은 북부의 표를 얻어 다수 득표로 승리했습니다. 민주당은 북부와 남부로 분열되어 북부 민주당은 스티븐 더글러스(오랜 링컨의 라이벌)를, 남부 민주당은 존 C. 브레켄리지를 후보로 지명했습니다.
남북 전쟁 후의 불화: 러더퍼드 B. 헤이스 대 새뮤얼 틸던 (1876년)
남북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1876년,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공화당 소속의 전쟁 영웅인 율리시스 S. 그랜트는 두 번째 임기를 마치고 있었으며, 당은 그가 3선에 출마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공화당은 러더퍼드 B. 헤이스를 현대적 개혁주의자로 지명했습니다.
반면, 민주당은 부패와 맞서 싸운 길드 시대 뉴욕의 개혁자 새뮤얼 틸던을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공화당은 그랜트 행정부의 정치적 스캔들을 극복하기 위해 남북 전쟁에 대한 책임을 민주당에 돌리며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양측은 재정적 부패를 포함해 여러 가지 비리 혐의로 서로를 공격했습니다. 결국 틸던은 대중 투표에서 승리하고 184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지만, 승리에 필요한 185명의 선거인단에는 한 명이 부족했습니다. 남부의 세 개 주에서 선거 결과가 확정되지 않았고, 그랜트 대통령의 공화당 행정부는 이들 주에서의 개표 감독에 나섰습니다.
최종적으로 의회는 세 주의 선거인단 표에 대해 논의할 위원회를 구성했고, 헤이스의 변호사와 틸던의 변호사들이 설득한 결과, 위원회는 남은 선거인단 표를 헤이스에게 주며 그를 대통령으로 결정했습니다.
첫 현대적 대통령 후보: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대 윌리엄 맥킨리 (1896년)
1896년이 되자 농민들은 도시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더 강력한 민주당을 형성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는 강력한 포퓰리스트였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었습니다. 많은 역사가들은 브라이언을 최초의 현대적 대통령 후보로 간주합니다.
젊고 깔끔하게 면도한 그는 빈번한 공개 집회를 열며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을 펼쳤습니다. 반면 그의 반대자들은 이러한 방식이 품위 없다고 주장했으며, 이전의 후보들은 지지자들이 대신 외침을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또한 민주당이 현직 대통령인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신 젊은 중서부 출신인 브라이언을 선택한 것에 대해 "찬탈자"라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브라이언의 새로운 스타일과 급격한 인기 상승은 전통주의자들, 특히 공화당원들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선거운동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며, 브라이언이 "거지처럼 케이크를 구걸하듯 대통령직을 구걸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심지어 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주장도 나왔으며, 몇몇 공화당원들은 의사들에게 브라이언이 비이성적이라는 기사를 신문에 쓰게 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러한 비방이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건전한 통화"를 지지하는 백만장자들의 후원을 받은 공화당 후보 윌리엄 맥킨리가 그해 11월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제3당의 방해자: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 우드로 윌슨 (1912년)
강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대통령 중 한 명은 윌리엄 맥킨리의 부통령이자 후임자가 된 시어도어 루스벨트였습니다. "테디" 루스벨트는 그의 용맹함과 강인함으로 유명했으며, 1904년 자신의 임기 4년을 당당히 따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는 워싱턴의 전례를 따라 3선 도전을 하지 않기로 했고, 그가 선택한 공화당의 후계자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4년 후, 루스벨트는 태프트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다시 백악관에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태프트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고, 이는 그를 전 상사인 루스벨트와 대립하게 만들었습니다. 공화당 전당대회가 다가오면서 양측 간의 비방전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스페인-미국 전쟁의 영웅이었던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대통령으로서 자격이 부족하고 무능하다고 비난했으며, 태프트는 루스벨트의 자아가 과도하다고 반격했습니다.
결국 공화당 지도부는 태프트를 지지했으며, 이에 루스벨트는 탈당하여 자신의 진보당(일명 황소당)을 창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공화당은 분열되었고, 민주당 후보 우드로 윌슨이 몇십 년 만에 백악관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첫 비백인 대통령에 대한 인종차별적 공격: 버락 오바마 (2008년 및 2012년)
2008년, 일리노이주 출신의 젊은 상원의원이 주요 정당 대통령 후보로서 처음으로 유색 인종 후보가 될 기회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많은 비방과 공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며 중간 이름이 "후세인"인 버락 오바마는 정치적 반대자들로부터 극단주의 무슬림이라는 비난을 자주 받았습니다. 인종차별은 그가 백인 대통령들보다 더 강하게 공격받는 요인이 되었으며, 청소년 시절의 마약 사용과 같은 문제들이 표적이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오바마에 대한 비방은 그의 공화당 경쟁자들로부터 나오지 않았습니다. 2008년 공화당 후보였던 존 매케인은 오바마를 "아랍인"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를 방어했습니다.
2012년 공화당 후보였던 밋 롬니는 오바마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논란이 많은 출생지 음모론에 대해 명확한 반박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에 오바마는 자신의 하와이 출생 증명서를 공개하여 자신이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임을 증명했습니다. 결국 오바마는 계속된 루머와 비방에도 불구하고 2008년과 2012년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미국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블랙 달리아(Black Dahlia)사건에 관한 11가지 충격적인 사실 (0) | 2024.12.05 |
---|---|
진주만 공격에 관한 10가지 사실 (1) | 2024.12.02 |
월트 디즈니: 미국의 꿈을 구현한 인물 (약력 및 사실) (1) | 2024.11.21 |
워싱턴 DC의 간략한 역사: 미국 대통령의 집 (0) | 2024.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