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공격은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에 결정적으로 끌어들인 사건으로, 미국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의 전쟁에 대한 관점을 영원히 바꿔놓았습니다.
1.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처음 발사한 총탄은 공격 전에 발사되었다
진주만 공격 당일 아침, 미국 군 관계자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일본의 소형 잠수함 한 척이 진주만으로 접근하는 모습이 포착된 것입니다.
지뢰 제거선 콘도르(Condor)가 이 잠수함의 잠망경을 발견했고, 즉시 근처의 구축함인 워드(Ward)에 이를 알렸습니다. 워드는 잠수함을 향해 발포하며 침몰시켰습니다.
그러나 당시 아무도 이 잠수함이 수백 명의 일본군 공격대의 선봉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사건은 군대를 즉각 경계 태세로 전환시키지 않았습니다. 해군 고위층은 워드의 보고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이 잠수함의 침몰 사실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60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2002년, 해당 잠수함의 잔해가 발견되면서 워드 승조원의 이야기가 사실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 일본 잠수함을 향해 발사한 총탄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발사한 첫 번째 총탄이었습니다.
2. 공격은 일부 가족들에게 특히 큰 비극을 안겨주었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 당시 USS 애리조나 함정에는 38쌍의 형제와 1쌍의 부자(父子)가 복무 중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형제들이 함께 복무하는 것이 사기를 높인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주만 공격으로 인해 애리조나 승조원 1,514명 중 1,177명이 목숨을 잃으며 군대는 가족 구성원이 함께 복무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갖게 되었습니다.
38쌍의 형제 중 23쌍이 모두 사망했고, 3쌍의 형제는 단 한 명의 생존자만 남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인 토마스(Thomas)와 윌리엄 프리(William Free) 역시 모두 희생되었습니다. 공식적인 금지령이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해군은 가족 구성원이 함께 복무하지 말 것을 권장하는 공지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이 함께 복무하려는 바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진주만 공격 이후, 아이오와주 워털루에 거주하던 설리번(Sullivan) 가족의 다섯 형제는 해군에 입대했으며, 이들은 1942년 USS 주노(Juneau)가 어뢰에 맞아 침몰하면서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가족들이 함께 적대적 지역에서 복무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해당 경고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3. 진주만 공격은 한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다
1925년, 영국 해군 장교 헥터 바이워터(Hector Bywater)는『태평양 대전쟁(The Great Pacific War)』이라는 소설을 출간했습니다.
이 소설은 결국 현실이 된 일본과 미국 간의 갈등을 예견한 작품으로, 미국에 대한 기습 공격과 이후 태평양에서 미국이 일본에 맞서 사용할 “섬 점령 전략(island hopping strategy)” 등 실제로 발생한 사건들을 묘사했습니다.
이 소설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일본 제국 해군의 연합 함대 사령관이었던 이소로쿠 야마모토(Isoroku Yamamoto) 제독도 이 책을 읽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야마모토 제독은 외국 주재 해군 무관으로 일하던 시절 이 책의 저자와 여러 차례 만남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태평양 대전쟁』은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 해군 장교들에게 필독서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소설이 직접적으로 진주만 공격을 유발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내용이 공격 계획에 일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4. 오늘날에도 USS 애리조나 생존자들은 전우들과 함께 잠들기를 선택할 수 있다
진주만 공격 당시 USS 애리조나는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함선으로, 단 334명만이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희생된 많은 승조원들은 구조되지 못한 채 배와 함께 영원히 잠들어 있습니다.
진주만 공격 생존자들은 사망 후 유골을 진주만 바다에 뿌릴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지지만, USS 애리조나 생존자들에게는 독특한 선택지가 있습니다. 바로 전우들이 잠들어 있는 USS 애리조나에 함께 묻히는 것입니다.
사망 후 이 선택을 한 생존자들은 잠수부들에 의해 USS 애리조나의 네 번째 포탑 자리에 유골함이 안치됩니다. 포탑 자리(barbette)는 함선의 포를 보호하기 위해 고정된 장갑 시설로, 생존자들이 영원히 안식하기에 적합한 장소로 여겨집니다.
안치식은 USS 애리조나 기념관에서 거행되며, 의식은 헌신의 글 낭독, 소총 경례, TAPS(군악대의 곡), 국기와 기념패 전달, 실제 안치 작업으로 구성됩니다. 2020년 기준으로 44명의 생존자가 이 선택을 했습니다.
5. 도리스 밀러,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로 네이비 크로스를 수상하다
도리스 "도리" 밀러(Doris “Dorie” Miller)는 텍사스의 소작농 아들로 태어나 20세가 되기 직전에 미 해군에 입대했습니다.
당시 해군은 1946년까지 인종 차별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입대자들은 대부분 육체노동 위주의 업무에 배치되었습니다.
도리 밀러는 급사(messman)로 USS 웨스트버지니아(West Virginia)에 배치되었고, 태평양 함대를 보강하기 위해 진주만으로 향했습니다.
진주만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밀러는 세탁물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갑판으로 달려 나갔고, 중상을 입은 지휘관을 발견했습니다. 밀러는 지휘관을 안전한 곳으로 옮긴 뒤, 비어 있던 대공포 위치로 향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아프리카계 해군들은 대공포를 포함한 무기에 대한 정식 훈련을 받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일본 전투기를 향해 발포했습니다. 총탄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그는 계속해서 싸웠습니다.
그 후 밀러는 동료들의 대피를 도왔고, 배가 침몰하기 직전까지 USS 웨스트버지니아에 남아 있던 마지막 세 명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일부 기록에서는 그가 2대에서 5대의 전투기를 격추했다고 전하지만, 정확한 수치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몇 달 동안 밀러의 영웅적인 행동에 대한 소문이 돌았지만, 정식 인정은 다음 해인 3월에 이뤄졌습니다.
도리스 밀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네이비 크로스(Navy Cross)를 수상했습니다. 이 훈장은 적과의 교전 중 발휘한 탁월한 영웅적 행동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명예훈장(Medal of Honor) 바로 다음가는 높은 군사 훈장입니다.
진주만 사건 이후에도 밀러는 해군에서 복무를 이어갔으며, 항공모함 USS 리스컴베이(Liscome Bay)로 배치되었습니다. 그러나 1943년 11월, 이 항공모함이 어뢰에 맞아 폭발했고, 승선한 대다수의 승무원이 사망했습니다.
당시 24세였던 밀러도 실종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1년 후 그는 전사자로 공식 선언되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미 해군은 도리 밀러를 기리기 위해 식당, 병영, 그리고 구축함 USS 밀러를 그의 이름으로 명명했습니다.
또한 그의 고향인 텍사스주 웨이코(Waco)에는 그를 기리는 공원과 여러 기념물이 세워졌으며, 다른 주에서도 그의 유산을 기리는 헌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6. 많은 손상된 전함들이 복귀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위해서는 진주만에서 발생한 잔해를 가능한 한 신속히 복구하여 실전에 투입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진주만 해군 조선소는 복구 작업으로 분주했으며, 일부 함선은 현장에서 바로 수리되었고, 나머지는 미국 본토로 옮겨져 대대적인 수리를 받았습니다.
진주만 공격 당시 피해를 입은 함선들 중에서 애리조나(Arizona)와 유타(Utah)를 제외한 모든 함선이 복구되었습니다. 복구된 함선 중에서도 오클라호마(Oklahoma)는 다시 복무하지 못했지만, 나머지 함선들은 복귀하여 실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침몰된 함선들에서 일부 장비와 자재가 회수되어 재활용되기도 했지만, 애리조나와 유타의 대부분은 여전히 진주만에 남아 있습니다.
한편, 침몰되었던 함선 중 캘리포니아(California), 네바다(Nevada), 웨스트버지니아(West Virginia)와 기뢰부설함 오글라라(Oglala)는 복구 후 일본과의 전투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복구 작업은 총 2년이 소요되었습니다.
7. 미국이 첫 번째 일본군 전쟁포로를 생포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이 생포한 첫 번째 일본군 전쟁포로는 진주만에서 억류되었습니다. 소위 가즈오 사카마키(Kazuo Sakamaki)와 그의 동료인 기요시 이나가키(Kiyoshi Inagaki) 준위는 진주만을 공격하기 위해 잠수함을 타고 이동하던 중 잠수함에 기계적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잠수함은 계속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고, 산호초에 세 차례나 충돌한 뒤 좌초되었습니다. 잠수함은 일본군 폭격기의 1차 공격 직후 좌초되었으며, 이를 발견한 미군 구축함 헬름(Helm)의 포격을 받았습니다.
헬름이 잠수함을 침몰시키지는 못했지만, 잠수함이 심각한 손상을 입으면서 사카마키는 동료에게 퇴함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나가키는 탈출 중 익사했고, 사카마키는 해변에 도달했으나 기절한 상태였습니다. 이후 그는 미군 장교들에게 붙잡혀 심문을 받은 뒤 본토의 전쟁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사카마키는 자신의 회고록을 출간했으며, 기업인으로 변신해 브라질과 일본에서 토요타(Toyota)를 위해 일했습니다.
8. USS 애리조나호는 여전히 매일 연료를 유출하고 있다
공격이 발생한 지 80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침몰한 USS 애리조나(Arizona)의 선체에서는 매일 기름이 유출되고 있습니다.
매일 약 9쿼트의 기름이 배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추정되며, 국립공원관리청(National Park Service)은 이러한 유출이 앞으로도 약 500년간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9. USS 유타호의 잔해 속에 묻힌 아기 소녀
일본의 공격이 발생했을 때, 앨버트 와그너(Albert Wagner) 주임사무관은 USS 유타(Utah)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폭격에서 살아남았지만, 그의 선실에 보관되어 있던 아기 딸 낸시(Nancy)의 유골은 유타호 잔해 속에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유타호는 해저에서 인양할 수 없었던 두 전함 중 하나입니다.
낸시와 그녀의 쌍둥이 자매는 조산아로 태어났으며, 낸시는 불행히도 생존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그녀의 자매는 4개월 동안 병원 치료를 받은 뒤 마침내 부모와 함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와그너는 함선의 군종 목사의 도움을 받아 딸의 유골을 바다에 뿌릴 계획이었으나,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낸시의 쌍둥이 자매인 메리 다이앤(Mary Dianne)은 “내 동생이 진주만에서 목숨을 잃은 영웅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과 기쁨을 느낀다”라고 말했습니다.
10. 엘비스 프레슬리가 USS 애리조나호 기념관을 위한 기금을 모으다
1950년대, 침몰한 USS 애리조나(Arizona) 위에 진주만 기념관을 세우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1960년이 되어서도 기금 마련은 절반에도 못 미친 채 정체된 상태였습니다. 이에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1960년 군에서 제대한 후, 1961년 3월 26일에 4,000명의 관중 앞에서 자선 콘서트를 개최했습니다. 프레슬리의 콘서트 수익금과 개인 기부, 그리고 그가 기금 마련에 끼친 대중적 영향은 기념관 건설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기념관은 1962년 5월에 완공되었습니다.
'미국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블랙 달리아(Black Dahlia)사건에 관한 11가지 충격적인 사실 (0) | 2024.12.05 |
---|---|
월트 디즈니: 미국의 꿈을 구현한 인물 (약력 및 사실) (1) | 2024.11.21 |
워싱턴 DC의 간략한 역사: 미국 대통령의 집 (0) | 2024.09.20 |
미국 선거의 더티 트릭: 비방 및 네거티브 캠페인에 대한 고찰 (1) | 2024.09.20 |